2022년

[039] 새의 선물

100 BOOKS 2022. 6. 2.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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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아빠」의 2022년 서른여덟 번째 독서

 

은희경 작가를 대한민국 대표 작가로 만든 그 유명한 소설을 이제야 읽었다. <새의 선물>은 1995년에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으로 올해 무려 100쇄를 찍었다고 한다. 은희경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작가에게는 후속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주었고,훗날 최은영 작가 등 많은 후배 작가들이 소설가가 될 결심과 영감을 주었다. 

 

제목이 왜 <새의 선물>일까 궁금한데, 작가는 소설을 다 쓴 다음에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자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네
-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전문

이 책은 12살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삶과 자신의 성장기에 대한 내용이다. '더는 성장할 필요가 없다'라고 믿는 조숙하고 영악한 열두 살 여자아이(주인공 진희)가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통해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본다. 작가는 이 소설이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1959년 생인 작가의 나이를 비추어 볼 때 그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만은 틀림없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작가의 세밀한 관찰력과 해학적인 서술력이다. 특히 12살 소녀가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상과 복잡다단한 인간관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역시 작가는 타고나는 것인가? 내가 표현했다면 단문으로 한 두 문장 쓰고 말았을 사건과 상황들을 은희경 작가는 한국어만의 풍부한 어휘와 어감으로 그려낸다.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책에서 나온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진희는 조숙한 어린이긴 하지만 영옥이 이모, 할머니, 광진테라 아줌마, 장군이 엄마, 미스 리, 최 선생님 등의 인물들은 다소 과장된 캐릭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마주치는 사람들이다. 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엄마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훔쳐간 앞집 아줌마, 저녁 밥상을 들어 내팽개친 세탁소 아저씨, 술만 마시면 난동을 부리는 이상한 아저씨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 몇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고자 한다.

 

p.75

아줌마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 든 간에 양복점 뒷방에서 강제로 순결을 읽은 순간 이미 자기의 삶은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자기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한번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 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 

 

p.251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로 불성실하다.

 

p.275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p.330

모든 중요한 일의 결정적인 해결은 꼭 우연이 해준다. 복잡한 계산과 치밀한 논리를 다 동원하고도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은 그 어렵고도 중요한 일을 어이없을 만큼 가볍게 해결해버린다. 

 

p.400

이모와 나 또한 그라는 존재를 가슴에 간직한 채 그대로 덮어두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가슴속에서 끄집어내 뭔가를 물어보려고 한다거나 지나간 일의 의미를 확인해보려 한다면 그날로 우리 모두의 삶이 다시 한번 흔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을 들은들 현재의 아무것도 바꿔놓을 수 없으며 과거의 감정에 대해 진의를 알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헛된 미련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p.439

나의 그동안의 삶이 일탈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내 삶을 방치한 적은 없다. 두 번의 중절 수술과 각기 한 번씩의 둔주, 방화까지를 포함해서.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그리고 너그러웠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 은희경, <새의 선물> 작가의 말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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