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3·64] 재수사 1, 2

100 BOOKS 2022. 10. 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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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아빠」의 2022년 예순세, 네 번째 독서

 

역시 장강명 작가다. 어떻게 이렇게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지난 일주일 동안 이 소설에 몰입했다.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잠든 적도 두 번이나 있다. 사실 추리소설이라는 게 정해진 수사 패턴과 방향이 예측되는 편인데 이 책은 의외의 반전으로 재미를 더하고 있다.

 

또 하나의 재미는 세밀한 관찰과 묘사다. 장강명 작가는 기자 출신답게 철자한 취재를 통해 사건의 전개와 상황의 변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감정이나 관계도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자로서 갖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판 성향이 글 곳곳에 드러난다. 이 소설의 주요 줄거리는 아니지만 작가는 휴대폰 유통구조에 대한 문제점도 드러내고 있다. 

 

다 읽고나서 첫 느낌은 철학적 배경을 가진 추리 소설이었다. 그런데 작가의 말을 보니 현실적인 경찰 소설이라는 것이다. 한국 형사들이 수사하는 과정을 영화처럼 과장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풍경을 비판적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충분한 시간외수당과 예산 지원 없이 개인 시간과 비용을 희생하면서 수사에 임하는 대한민국 형사의 모습이 존경스럽다. 오늘도 나쁜 놈들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경찰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소설에서는 두 가지 내용이 병렬적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주인공 연지혜 형사가 수사를 통해 22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범인이 자신의 철학과 사장을 전개하는 과정이다. 책의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후자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공리주의, 계몽주의, 도덕적 책임 등 윤리와 사상에 대한 것들이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1권 후반부에서 내가 생각한 사람이 범인이 맞았다. 살해한 이유는 2권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지는데 모멸감이었다. 사실 살해당한 민소림이 내뱉은 말은 범인을 경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범인에게는 충분히 모멸감을 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었다. 우리는 사회생활 중에 상대방이 오해할 수 있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말 한마디가 커다란 파국을 초래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장강명 작가와 나는 동 시대에 대학 생활을 한 같은 이른바 X세대로 불리는 40대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감수성이 풍부했던 20대 초반에는 인생의 중요한 문제처럼 생각되었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배우고 마르크스에 대해 토론도 하며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데모에 나가기도 했었다. 

 

또 하나가 있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었다면 이 소설에 대한 이해가 더 빠를 것이다. 물론 장강명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러시아 대문호의 작품 내용을 친절히 설명해주기는 한다. 민소림과 독서 클럽 멤버들이 읽고 토론했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백치> 같은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 

 

그럼 장강명 작가의 주옥같은 글을 인용해 본다.


<1권>

 

p.28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대체로 정의롭고 또 인간의 생명도 중시하는 편이지만, 정의와 인명이 전부인 것은 아니며 그 그것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p.103

사실 이런 모순들은 모든 사건의 특징이다. 어떤 모순점은 범인이 잡히고 난 다음에도 해결되지 않는다. 범죄는 인간 사이의 상호 작용이고, 인간들의 활동은 무엇이건, 언제나, 앞뒤가 잘 안 맞는다.

 

 p.244

어쩌면 시스템이라는 건 그게 작동한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연지혜는 생각했다. 

 

p.347

신계몽주의는 행복이 아닌 의미를 인생의 목적으로 제시한다. 그렇기에 의미 있는 불행이 의미 없는 행복보다 낫다고 설명한다. 

 

p.363, 393

나는 도덕적 책임에 원근법을 도입할 것은 제안한다. (중략) 우리의 공감 능력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었느냐에 좌우된다. 우리는 자주 보고 들은 대상이 우리 곁에 있다고 여긴다. 

 

p.372

모든 사람이 정직해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때 거짓말쟁이가 한 명 나타난다면, 그 거짓말쟁이는 압도적으로 유리해진다.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거의 거짓말 전략을 흉내 낸 모방범들이 등장한다. 거짓말쟁이들이 일정 수에 이를 때 비로소 전체 집단이 '진화적으로 안정된 상태'가 된다. 협박, 절도, 강도, 성폭행, 살인에도 다 해당하는 이야기다. 어느 사회에서나 범죄자의 등장은 필연이다. 


<2권>

 

p.19

"우리는 타인의 존중을 요구할수록 타인에게 의지하게 돼. 그리고 그만큼 더 나약해지게 되는 거야." 민소림이 말했다.

 

p.351

점박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나를 무시하는 사람도 그런 말을 내 앞에서 내뱉은 적은 없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내렸다. 그날 상처받은 부위가 사실-상상 복합체의 핵심에 해당하는 영역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략) 그렇게 나는 기괴한 철학을 지닌 살인자가 되었다. 

 

p.375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중에 제일 근접한 말은 '성실함'이에요. 지루하고 비루한 과정을 참고 견디는 자세죠. 거대하지만 실체가 있는, 실제적인 목표를 향한, 그 목표에 가는 길이 느리게 꾸역꾸역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 길을 걷는.

저는 그게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유일한 방법인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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