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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3] 살인자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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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아빠」의 2022년 쉰세 번째 독서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읽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말대로 이 소설은 술술 읽힌다. 설경구 주연의 영화로 먼저 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간결하게 압축된 문체 덕분이다.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왜 우리 시대의 대표 작가인지 명백히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렇게 간결한 문장들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이 소설은 살인을 밥 먹듯이 하다가 은퇴한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상실해가며 자신이 지어낸 허구 속에 산다. 마지막에 나오는 반전은 아마도 연쇄살인범에 대한 죗값일 것이다. 

 

그럼 김영하 작가의 몇 가지 말을 인용해 본다.


p.38

어쨌든 나는 그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p.87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삶에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악마적 자아의 자율성을 제로로 수렴시키는 세계, 내게는 그곳이 감옥이고 징벌방이었다. 내가 아무나 죽여 파묻을 수 없는 곳,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곳. 내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곳. 내 자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곳.


p.145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p.148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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