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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68] 방금 떠나온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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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아빠」의 2022년 예순여덟 번째 독서

 

김초엽 작가를 알게 된 건 행운이다. 그녀를 통해 새로운 소설 장르를 알게 되었다. 읽는 내내 낯선 미지의 세계로 떠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93년생 김초엽 작가는 포항공대에서 화학과를 마치고 생화학 석사과정 중에 작가로 등단했다. 2017년에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두 작품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했다. 이번 책은 그간 발표한 단편소설 7편을 모은 단편소설집이다. 

 

김초엽 작가는 화학 전공 학생으로 황열 바이러스 같은 열대 감염병 진단 센서에 대해 연구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생활 속에 사용되는 화학 물질에 관심이 많은 호기심 천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주를 배경으로 SF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작품 아이디어는 과학 잡지나 칼럼 등에서 얻으며 여러 아이디어를 모아뒀다가 서로 연결해서 발전시킨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가 한다는 이른바 'Connecting dots' 방법이다. 

 

그렇다고 김초엽 작가가 소설에서 최신 과학과 기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SF라는 것은 소설의 도구일 뿐 주제는 사람이다. 그것도 따뜻한 사랑을 가진 사람 말이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p.322~323)

 

"우리는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다. 그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 잠시나마 겹칠 수 있을까, 그 세계 사이에 어떻게 접촉면 - 혹은 선이나 점, 공유되는 공간 - 이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난 몇 년간 소설을 쓰며 내가 고심해온 주제였다. 그 세계들은 결코 완전히 포개어질 수 없고 공유될 수도 없다. 우리는 광막한 우주 속을 영원토록 홀로 떠돈다. 

 

하지만 안녕, 하고 여기서 손을 흔들 때 저쪽에서 안녕, 인사가 되돌아오는 몇 안되는 순간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되돌아보게 하고 때로는 살아가게 하는 교차점들.

 

그 짧은 접촉의 순간들을 그려내는 일이, 나에게는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로라>

p.126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오래된 협약>

p.223

우리의 긴 삶에 비하면 너희의 삶은 아주 짧은 순간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줄게. 


<인지 공간>

p.268~269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멀어져 온 격자 구조물을 보았다. 자정이 되어 서기관이 인지 공간의 조명을 세 번 깜빡였다. 조명이 완전히 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어둠에 잠긴 격자 구조물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 공간이었다. 공동의 기억이었다. 한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떠나온 세계이기도 했다. (중략)

저 밤하늘에는 별이 너무 많아서 우리의 인지 공간은 저 별들을 모두 담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저 별들을 나누어 담는다면 총체적인 우주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침내 이 행성 바깥의 우주를 온전히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그곳을 향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캐빈 방정식>

p.320

고개를 돌려보니 언니는 아주 천천히, 영원에 가까운 속도로 입꼬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언니가 의기양양하게 소시를 내어 하하 웃는 것처럼 보였다.

거봐, 내 말이 맞았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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