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는 아빠」의 2022년 스물한 번째 독서
기자 출신 소설가로 그 이름을 익히 들어왔던 장강명 작가의 책을 드디어 읽었다. 그의 문장은 명확하고 간결할 뿐만 아니라 몰입도가 높아서 이틀만에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을 읽은 첫 느낌은 섬찟하면서도 슬프다는 것이다. 머리는 둔기로 맞은 것처럼 한동안 멍한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는 하루에 30명 이상 자살하는 악명높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무엇이 그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가? 이 책의 주인공들은 자살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자살 선언을 하고 자기 삶을 스스로 마감한다. 장강명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의 아픔과 시대의 문제를 자살이라는 소재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 소설에서 모든 틀이 이미 자 짜여 있는 세상, 그 구조 속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부른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큰 성공을 맛볼 수 없고 발전이 완성된 사회의 조그만 부속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주인공 세연은 이러한 세상에 저항하고 반동하고자 자살을 선택하고 주변 사람들도 자살로 유인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표백 세대를 위해 대답해야 한다.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 않아도 개개인의 삶은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다. 주인공 세연처럼 '위대함'을 추구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은 어리석다. 위대함은 삶의 목표로 추구하기에 적당한 가치가 아니다. 남들이 무가치하다고 무시하는 일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끔찍하지만 가슴이 시렸던 소설 속에 글들을 인용하고자 한다.
p.77
"나는 세상이 아주 흰 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대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중략)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p.191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중략)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p.195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이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뜨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p.320
하지만 너희도 지금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해야 해. 이건 너희가 생각하듯이 멋있는 주장이나 투쟁이 아니야. 그냥 세상을 향한 집단 분풀이일 뿐이야. 정말 위대한 생각은 말이지,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한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어. 그래도 위대한 정신이라면 그 고독을 견뎌내지.
p.s.
이 책에 나오는 와이두유리브닷컴이 실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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